오! 이순신 장군여 1부에서 이어짐-
동족 죽이기의 한계는 곧 달리 말하면 기득권 층의 수구적인 자신들의 권리만을 지키기 위한
아집으로 세월이 흘러도 우리 민족이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암울한 역사의 잔재 이기도 하다.
이는 어찌 보면 진정한 국가의 주체가 왕조인가 아니면 백성 즉 국민인가의 가치관의
차이기
도 한데 당시 전제군주의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견 이해가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대국적 차
원에서 백성을 위한 성군적 시야가
아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2)이 순신과 노량 해전
23전 23승 불패의 신화 임진왜란 초부터 많은 해전이 있었지만 노량 해전 만큼 의구심이 많
이 생기는 해전은 없었다.
물론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지만 그 해전을 살펴 본다면 여러가지 의구심이 드
는 대목들이 눈에 보인다. 기실 노량해전은 이미
명량해전으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측의 퇴로
를 가로막고 달리 말하면 철수 하는 일본군을 응징하는 전투 이기도 한데 토요토미 히데요시
의
사망 후 조선철군을 명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실상 히데요시 사망후 본인 스스로가
일본의 맹주로서 야욕을 꿈꾸는 자였다.
개전초
부터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정유재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전투
에서 휘하의 병졸들을 잃은 고니시로 써는 일본내 평안히
머물며 입지를 다지고 있는 정적인
토쿠가와 이에아쓰를 견재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군병력을 손실 없이 일본으로 철군을 간절
히 원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장수들에게 뇌물까지 써가며 퇴로를 보장 할것을 요구 한것이기도 하다.
또한 선조 역시 부산진을
공격해 전쟁을 종식 시키라고 명령하여 이에 응하지 않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기용하여 칠천량에서 대패 시킨 잘못된 판단에 이순신이
명량에서 대승을
이루자 역으로 일본을 공격치 말라는 어이없는 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노량해전이다.
많은 해전이 있었으나 이순신 스스로 야간에 해전을 한 경우는 없었다. 또한 자신의 친족을
군선에 동승 하고 전투를 치룬적도 없었던
일이거나와 성격상 치밀하고 용의 주도한 이순신
장군이 대장선을 진중 한가운데 선두로 진출하여 전투를 지휘한 경우도 없었다.
즉
노량해전은 그 어떤 전투 보다 의외의 상황이 많았던 전투였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선택은 첫번째 전쟁에 나아가 전사를 하느냐 두번째 배를 돌려 도성을
쳐 선조를 제거하고 광해를 옹립 하던 역성
혁명을 하느냐 셋째 살아 돌아가 왕명을 거역한
처벌을 받느냐 3가지의 기로 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 볼수 있다.
물론 역사의 기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사를 택한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순신
장군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심증이
간다.
당시 상황은 위에서 열거한 3가지의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기로 기실 이순신 장군
의 휘하의 장수들도 이 모든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 노량 해전 후 일
본이 다시 재침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당시에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하의
장수들이 이순신 장군이 2번의 파직에 이어 살아서 선조 앞에 나아가
는 일을 찬성하였을 것인가?
곧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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