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

주렴계선생의 태극도설로 살펴본 음양오행의 역사적배경

벽강박성재 2007. 3. 1. 06:24
 

四柱 命理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陰陽五行 의 事象이 가장

중심이 된다. 인간의 사주를 관찰하고 연구하는 명리학은 동양 철학에서 우주 만상

속에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고 철학적으로 考察한다는 큰 命題에 있어서 본

다면 인간의 吉凶禍福의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한계가 늘 지적되어 왔다.

周易을 연구하는 관점을 보더라도 철학적 연구를 전제로 하는 義理易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인정하는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데, 실제로 象數易을 연구한다고 하면

점술이나 미신 따위로나 치부하는 학문적 차별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만큼 宇宙萬象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서의 연구에서도 그 양면성은 늘

존재해 왔다.

그러나 사실 철학과 인간의 생활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서로 땔 수 없

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철학이다. 어떻게 무얼 먹고 무얼 하면서 사는 것이 바르게 사

는 것인가의 근본적인 본질을 파고들다 보면 인간의 발생, 그리고 나아가 우주의 근

본 원리까지 추구해 들어가게 되는 것이 인간의 思考의 방식이다.

그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간 존립의 근거이다. 결국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고대의 사회를 살펴보면 이러한 철학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영역의 대한 자연의 해석에 불과하다. 또한 이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재해, 질병

이민족의 침입 등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래에 대한

불안한 인간의 심리가 철학적 해석의 의미와 함께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초자연

적인 것들에 대한 敬畏心과 함께 占이라는 형태의 샤머니즘적 성향과 더불어 태동

한 것이다. 즉 동양철학이라는 것에서 사상적 측면과 함께  한 인간사의 길흉화복

이라는 것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現代社會와 같이 지식이 체계적으로 開放되고 의학과 과학이 발달 되어 여러 인간의

문제를 多角度로 예견 할 수 없던 고대 사회의 철학이라는 것은 정신세계를 철학적

으로 구현하는 것과 인간의 여러 문제의식에 대한 결합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東洋哲學의 근간인 周易이라는 것도 이처럼 단순히 철학적이고 학문적인 것

으로 국한 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절반의 의미 밖에는 부여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되어 온 명리학이라는 것도 철학적 근거

를 바탕으로한 인간만사의 길흉화복에 그 초점을 둔 극대화된 학문의 한 분야로 보

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고 그 길흉화복의 핵심이 인간사요 곧 철학이다.

명리학의 근본인 음양오행을 이야기 하려면 역사 속에 학문과 이념의 발생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살펴보아야 올바른 지식을 파악 할 수 있는데 伏羲의 先天易과 文王

의 後天易 이후 완성된 周易은 周나라의 말기  春秋시대의 諸子百家의 여러 사상

가들의 사상에 근간이 되었었는데, 중국 문명의 토착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

샤머니즘적 사상과 老子와 莊子의 老莊思想, 그리고 제자백가 중 孔子의 儒家 등

다양한 사상의 뿌리이기도 하지만 약간의 다른 형태로서 분화 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춘추 시대만 하더라도 음양오행의 사상은 크게 유행하기 시작 하는 것으로

으로 보겠는데 春秋시대와 戰國시대를 거쳐 중국의 전체적인 통일을 이룬 진시황제

의 시대가 되면 그 사상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런 음양오행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은 한(漢)나라의 宰相인

동중서(董仲舒 B.C.179-104)이다.  그에 의해 편찬된 춘추번로(春秋繁露)의 내용

이 음양오행의 학문적 체계를 갖춘 본격적인 집대성이라 보여 지는데, 춘추번로는

동중서가 재상되기 이전 젊은 나이부터 읽어 온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그 내

용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춘추공양전은 孔子의해 편찬된 춘추경(春秋經)의 해설서 인데, 춘추경이라는 것은

공자가 지었다는 당대  춘추시대의  역사서이다. 또한 기록은 하였으나 짓지는 않

았다는 "述而不作"이란 말로도 유명한 역사서이다.

원래 한문이라는 것이 우리 한글과 같이 산문체적인 성격이 아닌 表意文字로 함축

적 의미를 담고 간략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 후대의 독자가 보기에는 많

은 애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춘추경을 해설한 전국시대의 책들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다.

결국 춘추공양전의 기록의 옮김이라는 것은 이미 공자시대에도 음양오행의 사상

들이 많이 퍼져있었다는 것이 되겠다.

중국역사에서 통일이라는 1차적인 결집력을 부여한 진시황제의 진나라는 그 통치

기간이 짧았고  분서갱유 같은 억압적 통치와 학문적 억압이 심했던 시기이다.

그 뒤로 들어선 漢나라는 건국의 이념으로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을 통일하고

儒家의 사상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공자의 사상인 유가의 가르침들은 이제 사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儒敎라는

국가적 차원의 종교화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 와중에 공자의 역사서인 춘추경의 해설서인 춘추공양전의 내용을 가지고 춘추

번로를 만들게 된 것은 사실, 제자백가의 다양한 학설로 문화적인 부흥은 이룰 수

있었지만 국론 분열의 극한 양상을 보였고 또한 진나라를 거치면서 억압적 통치

를 했던 진시 황제를 거쳐 다양성 보다는 새롭고 통일된 국론을 원하게 된 당시

한나라  왕조로서는 국론 통일은 새로운 왕조 성립의 핵심인 것이었다.

또한 모든 왕조의 성립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왕조 성립을 하늘의 뜻

으로 만드는 일종의 당위성 작업의 일환으로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재이설(災異說)

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등 일종의 예언적 성격을 중심으로 다루면서 漢왕조의

출현을 天道로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孔子를 신격화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음양오행 사상의 채택과 체계적인 정립은 왕조 건립에 따른 사상과 새로운

왕조 존립의 근거로서 이용된 것이다.

이처럼 명리학의 근간인 음양오행사상은 그 역사가 아주 길고 또한 단순한 음양

오행론에 입각한 어떤 術법의 논리라기 보다는 동양사상의 뿌리내리고 있는 철학

적 근거로서 국가 통치 이념등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후 수나라를 거쳐 唐나라로 오면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게 되고 국가통치 이념

으로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당나라의 문화는 당 末에 많은 불교적 폐해가 나타

나게 되고 다시 宋나라의 건국과 함께 불교를 멀리하고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유교가 다시 재정립 되게 되는데 당시 이 재정립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송나라

의 주렴계(周廉溪, 돈이 1017-1073) 이다. 이러한 유학의 재정립과 국가이념의

채택으로 유학자인 주렴계의 사상은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정호 정이 등의 제자

등을 가르치고 이는 新儒學으로 불리는 道學의 改組가 된다. 이러한 영향은 1세기

후 朱子가 나타나 13經을 우리가 알고 있는 四書三經의 모태가 된 四書集註를

저술함으로서 주자학이라 불리는 성리학으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성리학이 송나라의 정치 이념은 물론 후에 조선조의 건국에 또다시 국가

이념으로 채택되어 조선의 문명 속에 유교의 흐름으로 이어 지게 된다.

이러한 유교의 내부에 존재하는 음양오행의 사상을 기술한 주렴계의 태극도설

은 명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術法으로서가 아닌 역사와 사상의 이념

으로서 존재해 온 음양오행의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는 결국 인간의 길흉

화복만이 아닌 철학과 사상, 국가이념으로서의 큰 틀이 되어 온 음양오행에 대한

관찰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 속에 존재 했던 음양오행의 사상을 음미해 보고자 태극도설의 역사

배경을 잠시나마 살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