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강 사랑채

[역사포럼]역사다시보기1-경종독살설로 본 소론과노론의 당쟁사

벽강박성재 2008. 3. 5. 18:43

1728년 영조 즉위 4년 충청도 청주를 시작으로 삼남의 각 지역에서 반

란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반란의 명분은 先王인 경종을 영조가 독살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영조가

재위하는 50년의 기간 내내 영조의 발목을 잡은 과거사로 그 그림자에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던 영조였다.

여기에는 이 당시 가장 극심했던 당쟁의 역사가 함께 했던 조선의 당쟁사

가 숨어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모두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사인이 의심스럽고

독살 되었다는 설이 제기 되었던 왕은 많았었다.

이는 왕이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는 군주국가에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재위기간 내내 치세와 업적을 많

이 남겨 太平을 구가 했던 영조의 경종 독살설에 대해 한번 되짚어 보자.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를 했던 20대 임금인 경종, 경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 희빈의 아들 이었는데, 1720년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 4년이라

는 짧은 재위기간을 가졌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음모설은

후대에 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경종 즉위 4년째 8월 경종실록에 보면 경종은 病狀에 있었다.

실록의 내용을 보면 “임금의 병환이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를 올

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는데, 이날은 寒熱의 징후까지 있어 약방에서 입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 8월 28일

경종의 수라상에 계장과 생감이 올라온다.

당시 어의는 이것이 서로 상극의 음식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왕의 병 구환을 지휘하고 있던 당시 연잉군(영조)

는 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라상에 계장과 생감을 올리게 된다.

이 날 경종은 입맛을 되찾아 평소보다 식사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날

밤 경종은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가슴과 배의 고통을

호소하며 복통과 설사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어의가 탕약을 올렸으나 별 차도가 없었고 그러자 왕세제 연잉군

은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어의는 심하게 반발하고 나서는데, 어의는 “인삼과 부자를 쓰면

안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진여하고 다시 인삼과 부자를 올리게 되면

氣를 움직여 돌리지 못합니다.“ 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이는 그 동

안 어의가 처방한 약재들이 인삼과 부자와는 상극이라 함께 처방을 하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잉군은 “사람이란 본래 자기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느때라고 자기의견을 내세우느라 인삼을 쓰지 못하게 하는가?“

라고 어의를 꾸짖는다.

이 같은 논쟁을 벌여가며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처방을 올린 그 날밤 경

종의 병세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경종은 병석에 누운 지 20일 만에 승하하고 만다.

36세 의 한참 나이었다.


이렇게 왕위에 등극한 사람이 21대 임금 연잉군 영조였다.

후사가 없었던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정했었는데, 이들은 형제라고는

하지만 매우 불편한 관계였다.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 희빈의 아들이 경종이었고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의

또 다른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였는데, 숙빈 최씨는 장 희빈과 왕비 자리를

놓고 대립을 했던 인현왕후에 의해 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고 결정적인 고변을 한 사람도 바로 숙빈 최씨였다.

이로 인해 장 희빈이 사약을 받는 계기가 되었는데, 경종의 입장에서 본

다면 원수의 아들이 바로 영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조가 경종의 후사를 이었다는 것 자체가 많은 논란의 여지가 된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위와 같이 설명한 음식과 약의 처방에 대해서도 의

혹이 발생할 소지의 행동들을 한 것도 사실이다.

영조 4년 3월 이 인좌의 난이 일어나는데 반란군은 상여에 무기를 숨기고

청주성에 진입하여 삽시간에 청주성을 접수하고 세력을 더 키운 후 도성으

로 진군하는데 <당의통략>에 기술된 이들의 거사의 명분은 다름 아닌 경종

의 복수였다.

청주성 함락이후 삼남의 여러 지방에서도 거병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세력

이 상당하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5 일 만에 경기 이남까지 북상하고 이에 조정에서 급파

한 토벌군과 만난 곳은 경기도 안성의 금광산성이었는데, 매복하여 있던

토벌군은 밤에 야습을 통해 이 인좌를 비롯한 주모자들은 죽거나 붙잡히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이 인좌의 난을 토벌한 오명항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남

아 있는데, 이일로 오 명항 은 1등 공신의 칭호도 하사 받았다.

이처럼 영조 즉위 초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민심은 경종의 독

살에 관한 진실에 민감했었는데, 이 인좌의 난이 평정 되고 난 후에도 민심

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벽서사건은 끊이지 않았고 이것은 모두 경종 독살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처럼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두 가지 원인이 된 계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과 부자, <本草綱目>에 내용을 살펴보면 계장과 생감은 같이 먹게 되면

광란을 일으킬 수 있다. 고 기술되어있다.  계장은 성질 차가운 것이고 생

감도 성질이 차가운 것이 함께 먹을시 복통과 심한 설사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초래할 정도 치명적인 것이었을까?

당시 실록에 보면 경종의 병명이 기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 처방된

기록들로 경종의 병세를 짐작 할 수 있다.

柴陳湯

牛黃六一散

滾痰丸

桃仁升氣湯

大黃

枳實

등의 처방이었는데 이는 스트레스가 심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러모로 신체적 기능이 쇠약해져서 원기가 많이 떨어져 있는 그런 상태

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소화기능이 매우 약해진 상태에서 당시 한 여름 8월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배탈이 날 수 있는 계장과 생감을 올린 것은 역시 의문으로

남는다.

또 병세가 나빠진 상태에서 인삼과 부자의 처방 또한 문제였다.  당시

어의가 처방한 약재는 계지마황탕이었는데, 마황은 부자와는 전혀 상극

의 약재였던 것이다.

어의는 일관되게 설사에 대한 처방을 내린 것이었고 영조의 처방은 신

체가 양허(허하게됨)가 된 상태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인삼과 부자를 처

방한 것으로 보겠는데, 경종실록의 기록에는 “조금 지나자 임금의 눈동

자가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 라고 기록되어진 것으로 보아서는

당시 어의의 우려와는 달리 영조의 인삼과 부자가 원기를 북돋아 준 것

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계장과 생감을 먹고 병세가 악화되었고 인삼과 부자를 쓴 그 날

밤에 경종이 승하 한 것은 독살설의 증거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의 사실관계와 함께 또 다른 쪽으로 시각을 돌려보면

조선의 치열한 당쟁사가 함께하고 있는 사실을 엿 볼 수가 있는데, 경종의

아버지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군주였다.

당시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 할 수 있었던 정치적인 수단은 換局이라

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정권의 세력이 일시에 뒤바뀌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 조정은 서인과 남인

의 세력으로 대립되어 있었다.

숙종 재위 1694년 甲戌換局 이후 서인의 세력이 장악을 한 후 한동안 소

강 상태를 보이고 서인의 세력에 득세가 한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일당독재가 장기화 되면 서인은 노론과 소론이라는 세력으로 다시 나뉘어

지게 되는데, 이 결정적인 계기가 경종의 어머니 장 희빈의 사사 문제였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된 장 희빈을 두고 경종은 신료들에게 장 희빈의 구명을

애원하였는데, 당시 좌의정이었던 노론 이 세백은 세자 경종의 청을 외면

하였고 소론 영의정 최 석정은 세자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태가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된 것인데, 온건파

인 소론은 후일 보위를 이을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를 죽여

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것을 외면한 노론의 입장은 이미 이 당시부터 장 희빈은 물론 세자 경종

에 대한 지지를 거둔 것으로 경종의 독살설의 비극의 시작은 이미 이때 부

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14살의 어린 세자가 그 비극적인 사태를 맞이하고 30살의 청년으로 성장

한 1717년 7월 숙종은 세자 반대파인 노론의 영수 이 이명을 불러들여

일직 사관을 물리고 혼자 독대를 갖게 되는데, 이것은 이른바 丁酉獨對 이

다.  조선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단 둘이 사관의 기록도 없이 만나는 것은

밀실 정치를 금지하는 조선의 관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보기 드문 일이다.

이때 이들이 주고받은 것이 무엇인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이 일 이후 숙종은 눈의 안질을 이유로 국정을 돌볼 수 없으니 세

자가 대리 청정을 할 것을 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리청정은 국왕이 세자에게 정치를 수업시키기 위한 목

적 보다는 국정 운영을 잘 못한 경우 그 꼬투리를 잡아 폐위를 시키기 위

한 목적이 더 큰 것이었다.

이것은 세자 폐위를 위한 노론과 숙종의 음모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관

측이라 봐야겠다. 이는 세자인 경종이 즉위를 할 경우 연산군 때와 같은

어머니의 복수극이 일어 날 수 있고 그러한 폐주가 나올 경우 그 화는 장

희빈의 죽음을 외면했던 노론에게 돌아 갈 것이 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근거는 <당의통략>에서 정유독대의 밀담의 내용들이 밝혀지면

서 인데, 당시 임금이 세자가 아닌 또 다른 두 왕자 연령군과 연잉군을

이 이명에게 부탁했다 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숙종도 장 희빈 사사 이후 그 아들 세자 경종에게서 마음이 떠 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현왕후의 오빠 민 진원이 저술한 <한암말록>에서

숙종이  곳곳에서 아들 경종의 실수에 어머니 인 장 희빈을 빗대어 꾸짖

는 내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숙종과 노론은 이때 이러한 여러 정황을 고려하여 세자 교체를 준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 세력들이 강력히 반대

하고 나세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당시 소론의 영수였던  영중추부사 윤

지환은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관을 짊어지고 와 상소하기에 이른다.

이는 대리청정의 음모를 소론 쪽에서도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나 결국 대리청정은 관철 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노론의 뜻대로 세자

페위의 기회는 좀처럼 쉬 오지 않았다. 이는 소론의 세력이 세자를 지지하는

가운데 뚜렷한 명분 없이 실수를 하지 않는 세자를 쉬 페위는 할 수 없

는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숙종도 이 무렵부터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별 다른 사태 변화가

없는 시기를 지속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숙종은 승하하고 마는데 결

국 자연스럽게 세자 경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선왕과 집권당 노론이 원치 않았던 경종의 즉위, 이것은 반쪽의 임금에 불과

한 정치 상황이었다. 결국 노론과 소론은 본격적인 당쟁을 피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죽은 장 희빈의 처우 문제를 거론하게 되는

데, 소론은 지지 하는 반면에 노론은 강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것은 소론 세력의 성장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계기가 되는데, 자신의 생

모를 죽인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노론의 세력에 분개한 경종이었

지만, 노론 대신 누구하나 처벌 할 수 없었던 경종이었다.

또한 노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 후사가 없었던 경종에게 세자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복동생이었던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 할 것을 강력히 주장

하고 나섰다. 즉 연잉군에게 왕위를 잇게 하므로 해서 세력을 유지 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뜻대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관철 시킨다.

이것은 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고 왕권의 고유 권한인 세자 책봉

의 문제까지 거론하면서 자신들의 뜻대로 관철 시킨다고 하는 것은 무기를

들지 않은 것뿐이지 쿠데타와 같은 정치 현실이었다.

이것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소론측은 왕권에 대한 도전

을 좌시 할 수 없다고 상소를 올리고 유약했던 경종 또한 태도를 달리해

많은 노론측 인사들을 파직시킨다. 경종은 노론을 파직 시킨 자리에 대거

소론의 인사들을 중용 시키는데 이것은 이른바 辛丑換局이다.

이듬해 목호령의 고변 사건이 터지는데, 이것은 왕실의 토지 관리를 맡고

있던 목호령이 평소 노론 인사의 자제들과 많은 교분이 있었는데 이들이

경종살해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고변하게 되었다는 것이

“목 호령의 고변사건”이다.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노론 핵심 세력 수십 명은 물론 노론가의 수

많은 자제들이 음모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정유독대 이후 노론의 핵심

중에 핵심인 이 이명을 비롯, 많은 노론 대신들이 죽게 된다.

노론계 중심 세력이 풍비박산 나는 이 대참사는 그 중심에 세제 연잉군이

있었다. 이는 연잉군 으로 하여금 역적의 우두머리로 만들어 버리는 계기

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노론의 연잉군을 왕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행보는 결국 연잉군을

역적의 괴수로 만들었고, 이때부터 연잉군은 형인 경종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기 시작한 근거가 된 것이다.

이른바 이 壬寅獄死의 주역이 되어버린 연잉군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상

황이 되었는데, 경종은 많은 노론 대신을 사사하기는 했지만, 결국 동생

인 영조 연잉군의 목숨은 거두지 않고 살려두게 된다.

또한 왕세제의 자리도 유지 시켜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인옥사의 사태는

신하들이 왕을 선택하여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이른바 擇君 - 신하가 왕

을 선택한다 - 의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후 소론은 후사가 없던 경종의 뒤를 이어서 양자를 들여 왕위를 계승시

키고 연잉군을 폐위 할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이들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면 소론은 정치적 장악을 할 수 있었고 노론의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 앞서 설명한

경종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연잉군은 왕위에 즉위하게 된 것이고

노론 또한 다시 세력을 되찾게 된 것이 경종의 죽음이자 영조의 즉위 인

셈인데, 이처럼 숙종 이후 경종 그리고 영조로 이어지는 왕의 즉위는 수

많은 파란과 피의 당쟁역사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뒤 바뀐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상황은 영조 즉위 후 몰락하게 된

소론의 집요한 정치적 공세와 장외 투쟁 형식의 벽서 사건 등, 결국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이런 정치적 상황과 궤를 같이 하면서 더욱 증폭

되어 영조와 노론의 정치세력의 발목을 잡는 구실에 이용되어진 측면도 강

한 것이다.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소론 강경파 김 일경과 목 호령을 처형한다.

이것은 乙巳換局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영조 즉위 후 소론에서 노론으로

정치권력이 다시 전환되는 시점이다.

힘들게 정치권력을 얻고 다시 경종의 죽음으로 밀려나게 된 소론, 이 같은

상황에서 불거져 나온 경종의 독살설, 실록에 따르면 이 같은 설에 최초

근원지는 담양 부사 심 유현이다.

심 유현은 경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의 동생으로 경종의 시신을 직

접 볼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 같은 그가 경종의 독살설을 제

기했고 이 같은 믿을 만한 사람의 정황 증거의 말이 삽시간에 퍼졌던 것

이다. 이 심 유현이 소론이었다. 심 유현의 이름은 영조 4년 이 인좌의 난

에서도 나타난다. 반란의 주모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인좌 심 유현 등과 함께 반란을 주도했던 대부분이 소론의 강경파였다.

결국 이 인좌의 난은 영조 즉위 후 축출 된 소론의 강경파 중의 사람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그러자 왕위에 즉위한 영조는 이 인좌의 난 이후 당쟁의 금지를 선언 하고

나선다. 영조 자신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었던 피해자였고

또한 선왕 경종을 독살 시켰다는 여론의 세몰이를 받게 된 영조는 당쟁의

폐해를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 인좌의 난을 소론의 잔당을 소탕하려는 빌미로 삼으려는 노론을 막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통한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려 했던 것이

다. 탕평비를 세우면서 까지 당쟁을 막으려 했던 영조, 그러나 집요한 경종

독살설의 과거사에 발목이 붙잡힌 탕평책은 즉위 17년 1741년 영조는 신

유대훈을 발표한다. 즉 자신이 역모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임인옥사를 혐

의 없는 것으로 발표하고 관련 기록인 옥안을 불사른 것이다.


이것은 집요하고 끊임없이 임인옥사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인 소론 세력

으로부터 크나큰 정신적 압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임인옥사로 대변되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뛰어 넘는 새로운 정

치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하고 지난 과거사를 나름의 한계로만 재정립

하려 했던 영조의 정치적인 한계였다.

영조가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소론은 끊임없이 독살설로 영조

를 괴롭혔다.


세월이 흘러 정치적 과거사가 많이 희석 되었으리라 여기고 있을 때 영조

재위 31년 2월 나주 벽서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소론계 윤 지 라는

인물인데 다른 소론계 인사들과 역모를 준비 한 것으로 들어났다.

그리고 이 역모 사건을 처결한 기념으로 과거 시험이 치러지는데 여기서

또 다시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 시험 답안에 정부를 비방하는 글을 적어 낸 것이다. 이것이 영조

31년 5월 발생한 토역정시 사건이다. 수 많은 소론계 인사들 붙잡혀 왔

는데, 영조가 친히 국문하는 과정에서 소론 신 치호는 경종이 죽은 갑진

년 이후 계장을 먹지 않는다며 영조의 왕권을 부정하였다.

이 사건이후 영조가 받은 충격은 큰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지난 과거사를 끝까지 들먹이는 현실에 개탄을 한 것이다.

영조는 이와 같은 사건이후 많은 심경의 변화를 보인다. 친국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매를 맞아 죽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이 시기를 통해 영조는 탕평책을 무너뜨리고 노론 일당 독재의 시기

가 이어지면서  과거사를 들먹이는 어떠한 사건도 혹독하게 대처를 한다.

경종이 죽은 30년이 지난 시기까지 이러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재기 되는

것은 지나친 정치적 정략에 따른 과거사의 발목잡기 일 수 있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사실의 진실의 여부를 떠나 일생 동안 경종

독살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이것은 후 일 소론과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 했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까지도 불러 오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반대 세력 노론의 음모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것이 사도세자의 죽

음의 진실인 것인데, 경종 독살설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영조는 이로 인해

자신의 아들도 당쟁의 그늘에 희생시켰고 , 탕평책이라는 정책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 하는 바가 큰 것

이다. 공존과 조화가 실종 된 사회가 어떻게 될 수 있는 가를 극명하게 보

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 세태에서도 반성 할 여지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역사인 것이다.